어제 문득,
29살 때 해방촌 레스토랑에서 알바하고 마치고 나오던
저녁 때가 생각났어.
난 녹사평역 지하철 벤치에 앉아
GS25시에서 산 카스 캔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더랬지.
그러지 않고는
아마, 견디기 어려워서 그랬을 거야.
프렌즈라는 시트콤을 너무 재밌게 보고
레이첼처럼 웨이트리스를 해보고 싶어서
그리고 영어도 연습해보고 싶어서
용기내어 알바를 지원했었지,
재밌기도 했던 거 같아,
커피 만드는 것도 배우고
샌드위치 만드는 것도 배우고
항상 그래왔듯이 열심히 했던 거 같아.
그 결과,
알바를 시작한 지 열 달 후
나는 살이 엄청 쪄 있었지,
손님이 남긴 감자튀김이 아까워서,
일 끝나고 피곤함과 스트레스에,
매일 저녁을 술과 함께 했지.
무엇이든 열심히 했던 거 같아,
하지만 학교에서 열심히 한 것과 달리
사회에서는 성적표가 나오지 않았지,
나는 내가 일했던 어느 곳에서나
정말 열심히 했지만,
내가 바라던 우수한 성적표는 나온 적이 없고
내 몸과 마음만 너덜너덜해져있었지.
난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도 열심이었어,
난 최선을 다해 그들을 대했고
그럴 때도 방향은 이상하게 다른 곳으로 흘러들어갔지.
원하지 않는 관계를 갖게 되거나
하여간 아닌 쪽으로 흘러갔어.
지금에서야 생각해.
나는 나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
나를 위해 일하고
내 자신에게 성적표을 받아야 한다는 걸.
다른 이에게 최선을 다해
너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갔다는 걸.
그들이 아무리 높은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네가 존경하는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네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가족일지라도.
녹사평 벤치에 앉아
캔맥주를 벌컥벌컥 원샷하고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고 있던,
29살의 나에게 다가가
꼭 안아주고 왔어.
네가 열심히 하고 있는 걸 알아.
네가 너 자신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했던 거 알고 있어.
그렇게까지 했는데
길을 잃은 느낌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다 알고 있어,
다 보고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거 맘껏 체험해.
좋든, 나쁘든 모두 너를 위한 체험학습이 될거니까.
내가 항상 옆에 있어,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고 있어.
너 잘하고 있어,
너 굉장히 용기 있는 애야,
넌 특별해,
널 사랑해.
소녀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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