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우유박스에 열쇠를 꺼내려 손을 집어넣을 때마다
소녀는 누가 볼까 항상 불안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왜 열쇠를 식구 개수에 맞게 복사하지 않았을까, 별 것도 아닌데. 그 때 소녀는 이미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집열쇠를 가진 다른 애들이 행복해보이고 부러웠던 것 같다.
소녀의 불안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내 차에 나 혼자 앉아있는데도 긴장하고 있다. 어깨는 잔뜩 올라갔고 쇄골 또한 긴장했으며 항문은 안쪽으로 한껏 말려있다.
현관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날이 다가오면 불안해 미칠 것 같다. 예측 가능한 일상이 깨지고 알 수 없는 상태, 패턴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나의 구역이 침범당하고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라 불안해 미치겠는데, 이 불안을 받아줄 부모는 이 불안에 대해 전혀 모른다. 나는 조그만 나와 밖의 공간을 나누어줄 방문 뒤 어두운 틈에 가만히 있는다. 그렇게 조용히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은 특별히 신경쓰지 않는다. 자기 할 일과 자기 할 말 하기 바쁘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집인 작은 고모네의 매우 섬세하고 자상해보이는 - 구씨 집안 아빠들과는 매우 다른 느낌의 작은 고모부가, 하필 내가 마음이 있는 그 분이 나를 발견한다. 얘 왜 여기 있지? 너 왜 여기 있어? 여기서 뭐해? 순간 나는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잠시동안 안전하게 나를 막아주던 문은 젖혀지고 이내 너무 환해서 모든 게 훤히 드러날 거 같은 그리고 무얼 해야 할 지 모르는 바깥 공간과 구분이 없어진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할머니 사진 앞에서 울지 못하고 비상계단 문 뒤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이를 꽉 다물어도 참아지지 않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도 작은 고모네였지.
전철을 타도 옆에 모르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편하게 있지 못하는 나.
많은 것을 참을 수 없다. 인간을 참을 수 없다. 인간이 하는 짓을 참을 수 없다. 이 생을 참을 수 없다. 50억에서 70억이 되었는데, 굳이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가 없다. 고속도로에 차에 치여목숨을 잃은 동물들을 봐. 인간이 만든 것이, 인간이 하는 짓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지, 그런 인간이 굳이 꼭 살아야 할 이유를 못 찾겠어.
절벽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 느낌이야.
누가 조금만 툭 건드려도 낭떠러지로 곤두박칠 칠 것 같은 위태로운. 그런 느낌 느껴 본 적 있어?
오히려 어렸을 때 더 강건했던 거 같다. 그 때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겠지만 그 해결되지 않은 불안이 쌓이고 쌓여 눈두덩이처럼 곱절로 불어 아주 작은 입김에도 빠지직 바스라져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 어렸을 땐 이 정도까지는 아니였지. 나는 아주 어른스럽고 의젓하고 “모범적”인 아이였고 학창시절 내내 그랬다.
필통에 네가 썼던 글 기억 나? 넌 영어를 좋아했지. 영어로 정말 죽고 싶다고 필기체로 멋있게 썼어. 학원 영어 선생님이 그것을 보고 관심있게 나를 유심히 보며 걱정스런 얼굴로 니가 직접 썼냐며 물었는데, 나는 또 그놈의 아무렇지 않은 척 착한 모범생 행세를 하며 베시시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또 그 잘난 착한 모범생 행세를 하며 제가 썼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
그러곤 그 선생님은 괜찮나보다 생각했는지 그 후로 더이상 묻지 않았어.
G군은 엄마를 죽이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도저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거기에 있는데 말도 들이고 눈도 보이는데 뭘 듣고 뭘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3살 난 딸을 버리고 이사가버린 20대 여자, 아이를 발견한 건 아래층에 살고 있던 외할머니, 그런데 알고보니 죽은 아이는 20대 여자의 아이가 아니라 외할머니의 아이였고.. 자기 딸과 출산 시기가 비슷하여 아이를 바꿔치기 한 것으로 보인다고, 40대 외할머니의 내연남의 DNA를 통해 유기된 아이의 행방을 찾고 있다고..
40대.. 나도 이제 40대.. 혼자인 여자가 얼마나 쉽게 경망스러워질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연로한 여자들도 경외심 있게 행동하고, 중상하지 않고,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않고, 선한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디모데 2:3
이 글을 쓰려던 게 아니잖아.
너는 아닌 척 하면서 깨끗한 척 하려던 게 아니잖아.
너는 딸을 버리고 이사가버린 여자나 손주를 버리고 자기 자식을 손주로 바꿔치기한 그 두 여자보다 더 한 여자라는 걸 쓰려고 했잖아 원래..
딸과 엄마는 한 몸이다. 서연이와 승주는 한 몸이다. 승주도 한때는 엄마와 한 몸이었다. 나도 엄마와 한 몸이었던 때가 있었겠지..
나이가 들수록 그녀는 점점 더 약해졌다. 마흔이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오십이면 육십이면 그렇다는데 그녀의 나이는 반대로 가고 있었다. 아주 작은 흔들림에도 뿌리채 흔들렸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흔들렸다.
네비를 켰는데,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엄마보다 음탕했고 아빠보다 훨씬 큰 분노가 내 안에 있다’
모든 사람에게 분노한다.
모든 사람.
누군가 나에게 천 개의 좋은 단어를 말했어도 나를 찌르는 한 두 개의 말만 머리에 계속 남는다. “드럽게, 드럽게, 드럽게, 드럽게, 드럽게....”
내 안에 있는 분노를 그 사람에게서도 본다. 그게 나의 분노가 투사된 것인지, 본래 그 사람의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지만.. 한국인에게서 느껴지는 그 돈에 대한 갈망. 더 나아지고자 하는 갈망. 더이상 나에게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그것이 잘 보여
왜 사람들은 다칠 걸 뻔히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필요할까?
고갯길을 내려오면서 물었다. ‘하나님, 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인간을 구제할 수 있을까
남편과 함께 있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 아이같이 순수하고 맑고 행복해보였다. 평소의 시크한 말투와 표정과는 너무 달라 한동안 쳐다보았다. 결혼이란 이런 걸까,
니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힘이 없어. 허공에서 힘없이 메아리치다 흩어져. 근데 왜 힘없는 말을 잘난 척 하면서 해? 너는 쓸모없어. 도움이 된 적이 없어. You are helpless.
그 사람과 통화 후 머리가 너무 아파지고 힘이 없다. 사실 나는 누구나와 얘기해도 그렇다.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른 채 사는 것도.
그리고 도망가지 않은 그 사람은 도망가지는 않았지만 그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은 어쩌지 못하는 듯 했다.
스스로이게 스투피드 실리라고 말하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너네 아빠가 이렇게 너한테 말했을 것 같아 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아빠는 항상 병신 같이 왜 울어, 성격 히얀하네, 엄마 한테는 아예 대놓고 병신 같은 년, 머리에 똥만 들은 년 이라고 했으니까.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었다. 한낮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다 떼어놓고나면 뭐가 남을까.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의 성향이 어릴 때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8:21
내 안에는 삶을 놓아버리고 싶어하는 DNA가 존재하는 것 같다.
그녀는 심장에게 말했다. 크게 숨을 쉬어도 된다고.
내 진짜 질문은 지금 지구 인구가 70억인데,
그리고 사람이 100% 순수 선한 존재도 아닌데 꼭 전부 다 살아야 되느냔 말이다.
꿈
꿈을 꿨다. 너무나 생생한 꿈.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벽 너머 옆집같기도 하고 가까운 데서 들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벽 너머에서
꿈 이야기
잠이 들었다. 또다시 얘깃소리가 들렸다. 다시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겠거니 생각했지만 다시 생생했다. 창문에 뭔가가 아른거렸다. 남자아이 둘이 장난을 치고 웃으며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문이 닫혀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열려있었다. 급하게 닫으려고 하자 애들이 먼저 문을 활짝 열었다.
누구지..?
생기자마자 조금이라도 커지기 전에 생명의 끈을 잘라 보내버린 그 아이인가? 그 아이 같았다. 낯설지 않고 아는 아이라는 느낌이다. 그 아이들은 닫으려는 내 문을 힘껏 열려고 하였다.
왜 이런 꿈을 꿨을까.
엄마꿈을 꾸었다.
엄마는 뭔가 달라보였다. 같아보이기도 했다. 홀로서기를 하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나는 담배의 온갖 해악을 설명하며 동안 얼굴 늘어지니 피우지 말라고 설득했다. 벌써 기미 생기고 주름이 는 거 같다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인데..? 엄마가 항상 나에게 하던,, 아무튼 엄마는 알았다며 갔고 우리는 별 문제없이 이야기을 잘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꿈에서 나는 엄청 삐까뻔쩍한 곳에 있었다.
꿈을 꿨다.
누군가 굉장히 저명한, 뭔가 인생에 깊은 뭔가가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인생의 비밀에 대해 굉장히 뜸을 들이며 서론을 늘어놨다. 나는 계속 꼬치꼬치 물었다. 그래서 그게 뭔데요? 뭐예요? 그건 쉬워. 정말 간단해. 뭔데요? 믿음, 소망, 사랑. 믿음, 소망, 사랑이요? 너무나 익숙하고 원래 알고 있던 건데, 왜그렇게 생소하고 새롭고 갓 생겨난 아기같이 뽀얗고 말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호텔이라고 이름 붙어있지만 모텔 규모의 한적한 숙박업소에 들어섰다. 한 동남아 소녀가 카운터 앞에 앉아있다.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늘어뜨린채 핸드폰만 보고 있다. 카운터에는 대놓고 퇴폐마사지 사절이라고 써 붙었지만, 방에는 태국말로 어떻게 인사하고 마사지시 유용한 태국어 표현들이 코팅지에 코팅되어 있었다. 소녀의 얼굴을 모르지만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마를 가린 앞머리와 볼을 가린 양 옆의 긴 머리,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어 본 것은 속눈썹 밖에 없다. 눈도 얼굴도 보지 못하고 본 것은 앞머리 옆머리 속눈썹 뿐이다.
소녀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보다 나았을까? 몇 번을 곱씹고 되물어도 그것 아니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후회하지 않아요, 저는 제가 원하는 대로 했고 그래서 행복해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넘쳐 흐르고 있다.
그녀는 단지 그녀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